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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단군(고조선) 전 환국·배달국 실존” 이을형의 ‘법과 정의’…한국의 상고사 찾기(57)-단군조선(檀君朝鮮)과 고대역…

2,547 2016.09.01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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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단군(고조선) 전 환국·배달국 실존”

이을형의 ‘법과 정의’…한국의 상고사 찾기(57)-단군조선(檀君朝鮮)과 고대역사(26)


들어가며 - 내년 해방70년, 이래도 되나(2)
 
일본의 역사왜곡 포장은 명치유신사(明治維新史)와 함께 태평양전쟁사에서도 드러난다. 1961년 9월 우에야마(上山春平)의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의 사상사적 의의(意義)’가 일본 중앙공론(中央公論)에 게재(揭載)됐다. 그는 전시 중의 대동아전쟁사관(大東亞戰爭史觀), 점령군의 태평양전쟁사관(太平洋戰爭史觀), 맑시즘의 제국주의전쟁사관(帝國主義戰爭史觀), 모택동의 항일전쟁사관(抗日戰爭史觀) 등에 대해 논했다. 그는 이 같은 사관(史觀)들에 대해 “일본, 미국, 구소련, 중국이 말하는 특정의 국가권력의 이해를 중심으로 해서 가치척도를 만들고 있는 한 보편적인 역사인식척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 하야시(林房雄)의 ‘대동아전쟁긍정론(大東亞戰爭肯定論)’이 중앙공론(中央公論)에 연재됐다. 그는 대동아전쟁에 대해 “명치유신 이래 일관해서 일본지도자가 구미압박으로부터 아세아 제민족(諸民族)을 방위하기 위해 노력해 온 당연한 결과다”고 괴변을 늘어놓았다.
 
이들은 명치유신론과 태평양전쟁을 관련지으며 이를 일본 근현대사의 전 과정 속에 자리매김 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1968년 명치100년을 맞으며 ‘명치백년은 좋았다’고 대대적 행사를 하며 축제를 벌였다. 이들은 일본의 근대화 개념구성의 지표를 쓰면서 각국의 근대화 타입과 속도를 비교 검토했다. 이를 통해 국민의 역사의식을 정부가 통제하려고 가일층 노력했다. 일본은 1966년에는 국회회기를 연장하면서 까지 ‘국민의 축일법(國民의 祝日法)’ 개정을 강행해 사실상의 기원절(紀元節) 부활을 의미하는 2월 11일을 ‘건국기념일’로 제정했다. 이에 따라 1968년 10월 23일에는 정부주최의 명치백년기념식전과 지방자치제 식전이 일제히 거행됐다. 필자는 당시 일본에 유학 중이었기 때문에 이런 행사들을 생생히 볼 수 있었다.
 
일본은 이처럼 국민의 국가관, 역사관에 권력이 개입하고 있다. 이를 통해 국민의 사상을 어느 한 방향으로 향하게 해서 통제·동원하려 하고 있다. 이는 정부에 설치된 명치백년기념준비회(明治百年記念準備會)의 광보부회위원의 의견에서 드러난다. 명치백년을 축하하는 의의(意義)와 이유에 대는 광보부회위원은 “명치시대가 훌륭한 시대인 것을 인식시켜서 ’국민 에너지(Energie)를 재인식케 하고 새로운 의식에 눈을 뜨게 해 제2의 비약에 기여코자 한다”고 했다. 이런 흐름은 명치유신으로부터 오늘까지 그대로다. 역사교육을 전전(戰前)과 같이 수신교육(修身敎育)과 결부시켜 애국심앙양(愛國心昻揚)에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일본은 학습지도요령이나 교과서검정(檢定) 속에서 이를 관철시키고 있다. 또한 애국심을 덕목으로 가르치는 것이 역사교육의 목표는 아니다고 하면서도 무엇을 하는 것이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의 행복을 유지 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가르친다. 아울러 아이들이 장차 사회인이 됐을 때 자주적, 이성적으로 판단하도록 하기 위한 기초적인 지식과 사고능력 함양이 역사교육의 목표라고 하면서 왜곡된 역사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이에 반해 우리는 식민사관을 그대로 이어 받아 국가의 목표나 미래를 위한 역사교육은 아예 손을 놓고 있다. 예컨대 김영삼 정권 때는 역사를 바로 세우겠다고 하면서 국정을 담당한 책임자(총리 및 관료)들이 우리 역사과목을 사법고시를 비롯해 각 고시에서 없앴을 뿐만 아니라 수능에서도 없애버리는 망동을 하고 말았다. 이번 칼럼은 유네스코에서 인류의 기원이 이집트가 아니고 한국인이라고 발표한 존 카터 코벨박사의 이론 등을 자세하게 살펴보고 자 한다.
 
코벨 박사 “인류의 기원은 이집트가 아니고 한국인이다”
 
존 카터 코벨(John Carter Covell·1910∼1996) 박사와 그의 아들 앨런 카터 코벨(Alan Carter Covell) 박사가 지난 1978~86년에 걸쳐 쓴 책과 논문의 내용은 단군의 실존 이야기가 담겼다. 아울러 일본의 모든 문화 뿌리는 한국의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유네스코에서도 여러가지 증거를 바탕으로 한국의 역사를 인정하고 인류의 기원을 한국인이라 말하고 있다. 즉, ‘인류의 기원이 이집트가 아니고 한국인이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증거는 요동성 근방 만주지역에서 대량의 탄미(炭米)를 발견한데서 시작한다. 이 탄미에 대한 DNA 검사결과 자연산이 아닌 교배종이란 것이 판명돼 농사 기술이 대단히 앞섰던 것으로 판명됐다. 이 탄미(炭米)는 군량미로 추정된다. 불에 탄 흔적으로 보아 대단한 전쟁이 있었던 것으로 학자들의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그 추정 연도는 무려 1만7000년전이다. 당시 사람의 DNA 검사 결과 평균 수명 1000세에 달한다고 하고 있기도 하다. 아울러 고조선 이전의 환국, 배달국 등 왕국을 인정했다. 이는 노예제도가 없었던 유일한 환국의 역사를 유네스코에서 인정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우리민족의 ‘인간사상’(人間思想)을 엿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민사상’(天民思想)을 가진 한(韓)민족은 사람을 노예로 만들 수가 없는 사상이다.
 
중국과 일본은 우리 역사를 뒤집어엎으며 왜곡하고 있으나 중국의 시조라는 삼황오제나 일본 천황혈통의 기원은 모두 한국인이다. 중국 문자(文字)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낙빈기 학자도 필생의 대작인 ‘금문신고’에서 ‘동이족이 동양에서 최초로 나라를 세웠다’고 발표했다. 중국의 문명 또한 한국의 문명에서 비롯됐음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중국과 일본은 상고사가 없는 나라다. 중국 삼황오제의 역사도 우리 역사이고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 황실의 경우 고고학, 어법분석기술과 일본고서 등을 통해 살펴보면 일본천황 혈통의 기원은 한국이다. 이는 일본 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일본의 시조(始祖)는 서기전 660년이 아니라 서기 369년으로 천년이나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일본역사와 문화에 있어서 코벨 박사 모자는 이를 잘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일본은 한국문화를 일본 것으로 기만해 왔다는 사실도 폭로하며 오래전부터 한국문화의 산물을 일본 국적의 것으로 기만하고 역사를 왜곡해온 사실을 알렸다.
 
일본미술사 연구로 컬럼비아 대에서 백인 최초의 일본학 박사이기도 한 그는 일본문화를 연구하다가 그 근원인 한국문화에 심취해 한국에 까지 와서 깊이 있는 연구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그는 중국과 일본은 고대부터 오늘까지 역사왜곡이 문제임을 적시했다. 한국고대사와 고고학에 따르면 한국인들이 고대 중국과 일본의 지도자들이었다. 일본의 경우는 3세기까지만 해도 석기시대의 삶을 살았다. 우리는 그들에게 선진문물을 전수시켰다. 일본인이 한국인을 자기들 조상으로 모시고 있는 이유다. 앞서 칼럼에서 전술했지만 이세신궁(伊勢神宮)에 모셔져 있는 36신위(神位)는 모두 다 한국인이다. 그리고 그들은 순수한 일본 고유문화가 이룩됐다고 하는 10세기에 와서도 일본 궁내에서 소노가미(園神=가야 신라포함의 조상신1위)와 가라가미(韓神=백제조상신 2위)에게 제사를 드렸다. 소노가미(園神), 가라가미(韓神)가 모두 한국인이 아닌가. 그리고 제사 후 대궐사람들 중 누가 한국 춤을 더 잘 추는지 가려 뽑는 행사까지 한 그들이다.
 
도요도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일으킨 조일전쟁(임진왜란·壬辰倭亂)시 패전하고 돌아가면서 그들은 단군신상도 자기 조상이라고 일본에 가져갔다. 그들은 지금의 미야마(美山)에 있는 단군사당 교구산구(玉山宮)에 단군신상을 모시고 제사도 한국어로 했다. 해마다 음력 8월 15일이면 단군제(檀君祭)를 지내왔는데, 이때 불리던 축가와 제문 그리고 교구산구(玉山宮) 유래기가 심수관(沈수관)댁의 가보로 전해 오고 있다. 이런 사례들은 한이 없다. 일본의 역사는 2600년이 아니고 1600년밖에 안 된다. 현재 일본의 대 신사(大 神社)에 모셔져 있는 600여개의 신주(神主)가 한국인 신주(神主)이기도 하다. ※코벨박사의 이론이 담긴 책 = Korean Impact on Japanese Culture(저자: Dr. Jon Carter Covell & Alan Covell)
 
일본문화재 그 원조(元朝)도 조선이 하사한 것이거나 유민이 만들었다
 
고대에서 한국인이 정치, 학문, 기술, 예술, 종교 등 모든 부문에 있어서 현저한 공헌을 했음은 고문서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고대 한국인이 일본에 큰 영향을 주었고 그 업적은 지대한데, 일본의 문화재(文化財)가 우리 문화재로 주종을 이루는 것이 그것을 말해준다. 일본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고대문화재(文化財)의 거의 모두가 우리 것이다. 일본 교토(京都)에 있는 고류지(廣隆寺)에 있는 일본국보1호 미륵보살반가사유상(彌勒菩薩半跏思惟像)을 비롯해서 나라(奈良)에 있는 백제관음보살상(百濟觀音菩薩像) 등 많은 문화재가 한민족에 의해 만들어지고 하사(下賜) 받은 것들이다. 지역적으로는 고대 우리 유민이 밀집해 살았던 오사카(大阪), 나라(奈良), 교토(京都) 부현(府縣)의 근기지방은 물론 관동(關東), 오우(奧羽), 규슈(九州), 산사(山寺) 등이다. 이곳에서 많은 우리 유적들을 볼 수 있다. 그 이외의 것은 일제35년 간 침탈해 간 것들이다. 이는 당연히 반환돼야 할 문화재들이다.
 
이등박문은 초대통감(初代統監)으로 있을 때 도굴(盜掘)을 시켜서까지 우리 문화재를 도둑질해 갔다. 수많은 불교미술과 불상은 물론 도자기, 종(鐘) 등 그 문화재가 한국보다 일본에 더 많은 것이 이를 입증한다. 예컨대 종(鐘)은 우리가 등록된 것은 76개인데, 이중 42개가 일본에 있다. 지금 일본에 있는 우리 문화재는 상상 이상으로 많다.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것이 우리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것보다 더 많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 정도다. 1965년 한일협정 시 이 문화재를 회수 못한 것을 이제라도 다시 회수토록 해야 한다.
 
일본은 16세기에도 조선에서 유입된 사상과 유민을 바탕으로 예술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지난날 자신들의 유민 원한을 골수에 품고 은혜를 원수로 갚고 있다. 그 증거가 바로 왜구의 침입이고 노략질이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매우 심했다. 13세기(1223년~65년)에는 왜구가 한국을 병참기지(兵站基地)로 삼아 침략하고, 14세기(1350~1391년) 경인년(庚寅年) 이후의 왜구는 40년간 591회나 침입해서 온갖 노략질과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은 이 같은 노략질도 한민족이 외세침략당한 것이라고 포함하고 있다. 1392~1555년 조선시대는 왜구가 심해 울릉도 주민을 이주시켜 공도화(空島化) 정책을 할 수 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이들이 노략질한 문화재며 인명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리고 19세기~20세기 초 조선침략을 하면서 한국의 수많은 역사서책 수십만 권(총독부가 발표한 것만 22만 수천 권)을 불에 타 없애고 예술 활동도 금지시키면서 숱한 보물을 일본으로 가져갔다. 석굴암도 해체해 돌 하나하나를 일본으로 옮기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일본은 이처럼 거짓말과 날조를 통해 한국인에 대한 인적, 문화적 대량학살을 감행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는 어머니 젖을 먹고 키운 아이가 커서 어머니를 학대하는 망나니 같은 배은망덕 행위와 다르지 않다. 일본인 개인은 예의 바르고 친절하며 훌륭하지만 그 정부는 지금도 역사왜곡을 하면서 한국을 뒤흔들고 있다. 오늘날 한국을 위시해 일본의 양심적인 학자들도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가 일본열도의 진짜사서(史書)라고 믿지 않는다.
 
인류문명의 시원 한민족은 타민족을 지도한 위대한 민족이다
 
일본에서 가야와 신라를 정복했다고 알려진 유명한 신공(神功)왕후는 그 사실과 전혀 다르다. 오히려 신공왕후는 선단(船團)을 이끌고 왜를 침략해 정벌한 강인한 의지의 한국왕녀였다. 과거 군국주의 시대에 일본사가가 신공후(神功后)가 신라를 정복·통치했다함은 군국주의의 침략적 사기를 위해 조작한 것이다. 369년 일본의 첫째왕인 오진왕(應神王)부터 닌토쿠(仁德王) 등 일본 역사에 등장하는 왕들은 일본인이 아닌 순수 한국인 혈통의 왜왕이었다. 일본 건국자로 알려진 초대 일왕 진무(神武)는 4세기 부여인(夫餘人)들이 일본을 정벌한 사실을 반영할 뿐이다. 태양(太陽)의 여신인 아마테라스오카미(天照大神)는 무당이며, 그녀의 오빠 스사노오노미코도(素盞鳴尊)는 신라인이다. 그러나 8세기 역사가들은 이 두 인물에게 일본 옷을 입혔다. 20세기에 와서 이들의 정체가 드러나기까지 일본은 국민들을 속이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근세에 와서는 와세다(早稻田) 대학의 쓰다소우키치(津田左右吉)가 1919년 신라본기(新羅本紀), 1921년 백제본기(百濟本紀), 1922년에 고구려 본기(高句麗本紀)를 차례로 왜곡 비판했다. 그는 ‘삼국사기’ 초기기록이 허구라는 주장을 펴 제국주의 일본의 역사를 체계화한 장본인이다. 쓰다(津田) 교수의 제자가 바로 이병도(李丙燾), 손진태(孫晉泰)이다. 이들 두 사람은 서울대에서 교편을 잡고 일본의 왜곡한 역사방법을 따랐기에 오늘의 역사왜곡 토대가 만들어졌다. 이 피해가 지금 식민사관의 강단파를 낳게 해 우리나라 역사를 망가뜨리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고대사를 보면 1세기에 조선무녀(巫女)여왕 2대가 통치한 이도국(伊都國,=邪馬臺國)이 규슈(九州)에 있었다. 390년 일본에서 태어난 가야인 오진(應神-신공왕후·神功王后의 아들) 일왕이 나라를 세워 왜라하고 비로소 뚜렷한 실존 인물인 왜왕1대가 올랐다. 일본이 서기전 660년 일본이 나라를 세웠다는 것은 그래서 허구다. 거듭 강조하지만 코벨 박사 모자가 이를 밝히고 있다.
 
일본 학자들도 4세기말 5세기 초에 왜(倭)가 신라를 정복할 상황이 아니었음을 인식하고 있다. 당시 왜는 고구려에 대한 문제로 가장 고심했기 때문에 삼한정벌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와가모리타로(和歌森太郞) 교수나 나오기 고지로(直木孝次郞) 등은 왜의 정복설을 믿지 않으며 와가모리타로 교수의 경우는 “야마토 조정(大和朝廷)의 신공후(神功后)가 삼한(三韓)을 정복했다 함은 무엇인가”라고 묻고 있을 정도다.
 
1984년 10월 30일까지 세계사는 인류 문명의 발상지가 BC 3000년~2001년 동안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도, 중국에 의한 것으로 봤다. 그러나 요하문명(遼河文明 BC 4500~3000년경)은 다른 문명보다 먼저 일어났고, 우리 한민족에 의한 문명이었다는 것이 세계학자들에 의해서 이미 밝혀졌다. 즉, 오늘날 세계 고고학자(考古學者)들은 ‘인류문명은 선진문화 민족인 한민족(韓民族)에 의해서 시작됐다’고 이야기 한다. 그 증거로 요하문명(遼河文明=홍산문명·紅山文明)이 메소포타미아문명보다 1000년이 앞서고 이집트문명(BC 3200~343)보다도 앞선다. 황하문명(黃河文明)에 비해서는 2000년이 빠르다. 요하문명(遼河文明)은 또 가장 빛나는 문명이다. 황하문명(黃河文明) 역시 한민족(韓民族)이 중원(中原)과 황하강(黃河江) 유역에서 역법(曆法), 천문지리, 의학, 율법, 의식주 생활을 고도로 발전시켜 일으킨 문명이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고대 중국 한족(漢族)이 문명을 일으킨 곳은 아무곳도 없다. 중국 한족(中國漢族)은 그때 그곳에 살고 있지도 않았기에 문명을 일으킬 수도 없었다.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인간 단군을 찾아서’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최인 ‘한국학강의’, 존 카터 코벨 지음·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김부식 ‘삼국사기’,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한창건 ‘환국·배달· 조선사신론’, 우창수 ‘아사달!-인류최초의 문명을 품다(상)(하)’, 임길채 ‘일본 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강동민 ‘불쌍한 대한민국’, 한정호 ‘대조선민족사’, 박찬희 ‘지구촌 인류를 구제할 법칙’, 송부웅 ‘한민족의 대륙역사’ ‘삼성(三聖)의 역사’, 한창건 ‘한국고대사 발굴’, 日本國書 刊行會 ‘神皇紀’,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林承國 ‘韓國正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洪以燮 ‘朝鮮民族史觀と日本帝國主義の植民政策’, 吉川幸次郞 ‘漢の武帝’, 貝塚茂樹 ‘中國の歷史’, 秋山謙藏 ‘日本の歷史’, 津田秀夫 ‘日本史’, 三省堂 編修所編 永原慶二 監修 ‘中學社會歷史’, せいいくど ‘新. 漢民族から大和民族へ’, 坂本泰良 ‘明治維新から現代へ’, 遠山茂樹山 ‘明治維新と現代’, 邊健太郞 ‘日韓倂合小史’, 日本倫理學會編 ‘思想史の意義と方法’ 외 다수 서책을 참조·인용 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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